2024년 | 241014-영인산 자연휴양림(특별산행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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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영 작성일24-10-20 00:47 조회15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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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정]
0730 압구정동 공영주차장 출발
0950 아산시 영인면 자연휴양림 상부 주차장 도착
1001 상투봉 들머리 산행 시작
1017 수국 계단길
1020 영인산 수목원
1036 상투봉(299m)
1056 닫자봉 갈림길
1116 닫자봉(275m), 간식
1153 닫자봉 출발
1154 닫자봉 아래 휴양림 삼거리
1214 산성계단 삼거리
1228 955계단 시작, 계단 옆은 영인산성
1242 955계단 올라섬
1249 영인산 신선봉(364m, 김시영, 송경헌, 양승찬, 최택상)
1305 신선봉 전망대
1309 신선봉 전망대 하산
1317 깃대봉(351m)
1325 시련과 영광의 탑
1400 A조 1명 야영장 도착, 3명은 1430에 도착.
1610 야영장 출발
1640 걸어서 하부 주차장 도착
1700 휴양림 출발
1830 압구정동 도착
[참가자]
곽성균, 김시영, 서병일, 손훈재/김미경, 송경헌, 양승찬, 최택상, 홍기창
[낙 수]
1. 우리 22회 산우회가 고교 총동문산악회에서 주관하는 산행에 처음으로 참가한 것은 1997년 9월 20일 밤에 12명의 동기가 무박으로 백두대간의 제3구간인 성삼재~만복대 구간을 등산한 때이다. 그후부터 총동문산악회가 주관하는 정기산행은 우리 동기회의 연간 산행 일정 중의 하나로 정식으로 편입되었다.
2. 총동문산악회의 정기산행은-백두대간 산행 등 특별산행은 제외-이번 영인산 등산이 107차이니, 30년 가까이 해마다 계절에 맞추어 지속하고 있는 동문들의 큰 산행 행사이다.
2000년대에는 많을 때는 500~600명의 동문이 38인승 버스 15~16대를 동원하여 산행을 한 적도 여러 번 되었다. 동문들이 한꺼번에 좁은 산길을 올라가는 바람에 산행 들머리에서는 등산 체증까지 일어나는 것도 다반사였다. 꾀를 내어 역방향으로 산행을 하더라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앞서간 동문들이 적지 않을뿐더러 일반 등산객도 몰리는 주말이므로 잔꾀를 부려봐도 역시 별무신통하였다.
산행 체증보다 더욱 어려운 문제는 수백 명이 하산 후에 한꺼번에 회식 및 식후 행사를 진행할 수 있는 널찍한 장소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허구한날 북한산 아래 우이동 자락이나 청계산 원터골 또는 옛골만 찾을 수는 없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도 최근에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대규모 산림휴양단지를 경쟁적으로 조성하여 방문객을 유치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총동문산악회의 정기산행을 위해서라도 크게 환영할 일이다.
우려되는 점은 이렇게 많은 동문들이 함께 모여서 성대하게 치루던 정기산행에 참가하는 선후배 동문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 뿐만 아니라, 동기별 산우회 모임조차 결성되지 아니한 후배 기수가 늘고 있는 현상이다. 이번 정기산행을 보더라도 불과 170명의 동문이 참가하여 4대의 버스만으로도 이동이 가능하였다. 후배 기수로 내려갈수록 등산에 대한 관심이나 모교에 대한 자긍심은 말할 것도 없고, 동기들 내부의 연대의식조차도 엷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나혼자만의 착각인가. 재학생의 숫자마저 격감하는 추세이고 보니 총동문산악회의 미래는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정보화시대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현상은 총동문산악회라는 게마인샤프트(공동사회)의 해체를 촉진하는 요인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3. 아산은 방조제나 삽교천, 현충사가 떠오르는 정도 외에는 특별한 기억이 없이 여행 중에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광을 보는 도시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다가 이번 산행을 통하여 아산은 영인산과 그 주변의 중첩한 봉우리들이 도시 후면을 첩첩이 둘러싸고 있어서 제법 그윽한 맛까지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처럼 개인적으로는 평생 방문할 생각을 한다는 것조차 쉽지 않은 도시의 낯선 산을 등산하면서 그 도시에 대한 지식과 선입견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동문들에게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총동문산악회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4. 4~50대에는 우리 동기는 총동문산악회에서 나이가 어린 축이어서 난이도에 따라 산행 루트를 달리할 경우에는 난이도가 가장 높은 루트로 등산하는 A조를 택하는 친구가 대부분이었다. 세월이 갈수록 총동문산악회에 들어오는 후배기수가 늘어나면서 탑승하는 전세버스에서도 맨 앞좌석을 차지하고, 산행도 B조나 C조의 루트를 선택하는 친구들이 점차 증가하였다. 등산이 스포츠에서 소풍 내지는 단거리 여행이라는 휴식의 한 수단으로 변한 나이에 이른 것이다.
이번 영인산 등산에서는 이러 현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통과할 봉우리가 많은 산행이고 보니 봉우리 하나를 넘을 때마다 참가한 9명의 일행이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빠져나가듯 줄어들었던 것이다.
5. 해발 고도가 200m가 넘는 싱부 주차장을 출발하여 산책로 같이 예쁘고 편하게 조성된 수목원 길을 지나서 30분 만에 해발 299m인 상투봉에 이르렀다. 상투봉 전망대에서 다음 목표지인 닫자봉을 바라보면, 산길이 저 아래 계곡 맨 바닥까지 완전히 내려갔다가 다시 그만큼 올라가는 모습이 뚜렷하다. 등산시에 가장 맥빠지게 하는 산길의 모습 그대로다. 일행 중 3명이 가장 먼저 휴양림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6. 상투봉에서 닫자봉까지 거리는 1.1km이다. 20분을 내려가서 다시 20분간 올라가니 해발 275m의 야산인 닫자봉 정상에 닿았다.
“닫자봉”이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지 감이 얼른 들어오지 않는다. 윤선도의 어부가에 나오는 후렴구인 “닫 드러라 닫 드러라”의 “닫”은 닻(碇, ancor)의 옛 표기이다. 닫자봉의 “닫자”란 닻(碇)과, 의자나 모자 등의 용례에서 보듯이 “사용하는 물건”이라는 뜻을 가진 접미사 “자”(子)의 합성어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주봉인 신선봉과 그 앞의 깃대봉으로 이루어진 영인산의 전체적인 형상을 선체(船體)로 간주하고 그 오른쪽으로 떨어져 있는 작은 봉우리를 닻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 닫자봉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혼자서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려보았다.
7. 사방이 숲에 둘러싸여서 전망이 없는 닫자봉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면서 30여분간 휴식을 취하였다. 닫자봉 정상 바로 아래에서 다시 2명이 휴양림 쪽으로 가고 나머지 4명만 영인산으로 향하였다. 동문 일행이 간간이 보이는 가파르지 아니한 계곡길을 20분간 걸어가니 좌측으로 영인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산성계단 표지목이 보였다,
정상까지 600m 남은 거리의 대부분이 955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졌고, 계단 옆은 바로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인산성이다. 산에 성을 쌓았다는 것은 그 위치가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열 번 정도는 쉬고서야 14분 만에 955계단을 간신히 올라갈 수 있었다. 동기 최고의 등산객인 남강 최고문과 골매 송대장은 나와 같이 계단을 출발했음에도 이미 몇 분 전에 정상에 도착해 있었다.
8. 영인산 정상은 신선봉이라는 별도의 명칭을 가지고 있다. 덩치가 크고 고도가 높아서 작은 봉우리를 많이 거느리고 있는 큰 산인 경우에는 그 정상에 별도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리산 천왕봉, 설악산 대청봉 등등. 이런 산에 비하면 해발 364m에 불과한 영인산 정상에 따로 신선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좀 의외이다.
아무튼 정상 가까이에 따로 가설된 전망대에서 보면 전면인 서쪽으로는 아산호와 삽교호가 서해 바다인지 호수인지 분간할 수 없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고 아산시와 그 일대의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평택시까지 조망할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아산호 너머로 당진군이 가물거린다.
9. 전망이 탁 트인 영인산 정상이고 보니, 이곳에 성을 쌓아 사방을 감시한다면 멀리서 아산만 방향이나 당진 또는 평택으로 다가오는 적의 동태를 신속하게 살피기에 안성맞춤이다.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20권 아산현 조에 의하면 “신성산성(薪城山城)은 그 산마루에 옛성 두 개를 연해서 쌓은 것이 있는데, 그 북쪽 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주위가 4백 80척에 높이는 10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날이 가물면 이곳에 비를 빈다. 그 남쪽 성은 흙으로 쌓은 것이 주위가 4백 80척에 높이가 4척인데, 옛날에 평택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우거한 사실이 있어 평택성(平澤城)이라 이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860년대에 김정호가 저술한 대동지지의 5권 충청도 아산편에 의하면, 신성(薪城)은 영인상(寧仁山) 위에 있는 성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위 기록으로 보면, 현재의 영인산은 처음에는 薪城山으로 부르다가 후에 寧仁山 혹은 靈仁山(국조인물고, 이덕민편 등)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10. 신선봉과 전망대에서 20분간 머물면서 4명은 독사진까지 찍은 후에 깃대봉을 거쳐서 연화봉 중턱에 조성된 시련과 영광의 탑 앞에 이르러서 사진 한 컷을 찍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는 말할 필요도 없고, 유럽을 여행해 보면, 일반인들이 이용하는 공원이나 광장에 설치된 조각물은 사실적인 작품이 거의 전부이고, 추상적인 조각품이 설치된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조각예술 전시장이 아닌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조각물은 일반인이 한 번 보고도 조각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적인 작품을 설치하는 것이 적절하다.
작품의 의미가 이미지를 통하여 대중에게 직접적이고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는 사회주의 예술관에는 예술 작품의 창작 목적을 제거한다면 나름대로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이런 점에서 작품의 의미에 대한 장황한 해설에도 불구하고, 일별하면 단검을 쥐고 있는 주먹의 형태를 띤 “시련과 영광의 탑”은 적절한 공공 조각물로 보이지는 않았다.
11. 탑을 지난 다음 휴양림 방향으로 빠른 걸음을 내디디니 1시40분 경에 알맞게 휴양림 관리실 건물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침 버스 안에서 집행부가 나누어준 샌드위치에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닫자봉에서 먹은 음식이 체해서 그런지 갑자기 뱃속이 불편해져서 황급히 관리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0분 후에 화장실을 나오니 나머지 3명의 일행이 보이지 않아서 혼자 야영장까지 내려갔다.
B코스나 B+코스를 택하여 먼저 하산한 일행 5명이 우리 기수에게 배정된 야영장 구역에 둘러앉아서 불판에 고기를 굽고 있었는데 나보다 10분 먼저 도착했어야 할 나머지 완등 동행자 3명이 보이지 않았다. 30분 후에야 나타난 3명은 야영장으로 내려오는 길을 잘못 찾아서 30분간 뒤풀이 등산 삼아 본의 아니게 휴양림을 한바퀴 돌았다는 것이다. “너네들도 내 나이 되면 다 그렇게 돼!” 라는 것이 나 혼자 속으로만 생각해 본 그들의 변명이었다.
12. 그 후 9명의 일행이 맛있고 풍성한 삼겹살과 그에 맞는 반찬이 시장기와 함께 어울린 맹렬한 식욕을 가지고, 불판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서. 어깨가 아프도록 많이 집어먹고, 입가가 당기도록 웃고 떠들면서, 구름이 가을 오후의 햇살을 알맞게 가려준 청량한 산속에서 세상을 잊을뻔한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