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 241214-용문산 백운봉(특별산행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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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영 작성일24-12-22 16:08 조회22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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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백운봉(특별산행 41)
[일 정]
0938 양평역
1025 용문산 자연휴양림 주차장(양승찬 승용차와 택시로 이동)
1031 두리봉 들머리 삼거리
1119 두리봉(543m)
1219 헬기장(675m)
1315 선두 백운봉 도착(940m)
1420 점심 후 하산
1455 자연휴양림 삼거리
1502 백년 약수터
1555 자연휴양림 주차장
1620 양평해장국, 탄핵소추안 가결 뉴스
1810 양평역 도착, 커피
1839 경의중앙선 승차
[참가자]
곽성균, 김시영, 문주일, 서병일, 손훈재, 송경헌, 양승찬, 최택상
[낙 수]
서울 근교나 경기도 동쪽에 있는 웬만한 산의 전망 좋은 곳에서 남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정삼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유독 또렷이 솟은 봉우리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앙평시 용문면에 있는 해발 940m의 백운봉이다. 용문산 능선은 두리봉(543m), 백운봉(940m), 함왕봉(947m), 장군봉(1,064m), 정상인 가섭봉(1,157m), 용문봉(951m) 등 꽤 높은 봉우리들로 이어진다.
백운봉을 등산하는 기점은 대체로 양평역에서 가까운 새수골 입구의 용문산 휴양림에서 출발한다. 2020년 5월 31일에는 김용수, 진영산 학형과 함께 새수골을 출발하여 백운봉을 거쳐서 용문산 정상인 가섭봉까지 올라갔다가 용문사 은행나무에 이르는 용문산 종주 코스 21km를 7시간 10분만에 주파한 적이 있다. 그 중에서 특히 가섭봉에서 용문사로 내려오는 하산길은 지리산의 세석~거림 구간 못지 않은 바위 투성이의 너덜지대여서 다시는 용문산 종주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소요시간과 위험도의 면에서 힘든 코스였다.
2021년 1월 3일 백운봉 등산 시에는 아신역에서 양승찬 학형의 승용차로 사나사로 이동하여 함왕성지를 거쳐서 함왕봉, 백운봉, 헬기장, 새수골 코스로 산행하였다. 3년 후인 금년에는 두리봉 코스로 올라가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최근 4년간 3차례 백운봉을 올라갈 때마다 다른 코스로 간 셈이 되었다.
등산에 관하여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읽어보면, 산 이름이나 지명의 유래 등 해당 산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는 내용은 거의 대동소이하여, 처음 올린 글에 오류가 있으면 그 오류는 고쳐지지 아니한 채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현상을 자주 목격한다. 개인적으로는 등산을 다녀온 후에 산행일지를 쓰면서 지명의 유래 등에 관해서 고서적 기타 믿을만한 원전으로 직접 확인해 보는 과정은 등산 못지않게 즐겁다.
대동지지 제4권 양근(楊根, 오늘날의 양평시) 편에는 용문산의 원래 이름은 미지산(彌智山)이고, 가섭봉과 백운봉, 사나사 등의 명칭도 보인다. 그러나 함왕봉이나 함왕성지라는 명칭 내지 기록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당초에 백제 땅이던 양근을 거사참(去斯塹)이라고 불렀다가,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하여 이곳을 점령하자 항양(恒陽)으로 이름을 고쳤고, 신라 경덕왕 때에는 빈양(濱陽)으로 개칭하였다. 양근은 고려 태조 때 다시 개칭한 이름이다.
사나사는 고려 태조 6년(923년)에 처음 세워진 사찰로, 사나(舍那)란 노사나불의 “사나”를 의미한다. 노사나불은 보신불로서, 법신불(비로자나불), 화신불(석가모니불)과 함께 불교의 삼신불 중의 한 부처이다.
백운봉 등산로 중에서 사나사에서 출발하면 함왕봉 아래 능선에 함왕성지가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성씨 중에서 양근 함씨는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문종)에서 대사마대장군이라는 조서를 가지고 입국한 함혁(咸赫)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문성왕은 그를 임화(양근)의 자사(刺史)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함혁은 신라로 귀화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 후손들은 함혁을 함왕 주악(咸王 周鍔)이라고 칭하고, 탄생지는 함왕봉 아래의 성공혈이라는 바위굴이라고 신화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도록 함왕봉이나 함왕성이라는 지명은 어느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백제나 고구려 때 처음 축성한 것으로 짐작되는 이른바 “함왕성”은 고려 고종 34년(1247년)에 몽고의 4차 침입이 있자 인근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이곳에 다시 성을 쌓고 치소까지 건립한 장소였음이 발굴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고구려 장수왕 때 붙인 “항양”이라는 지명은 “함왕”으로, “항양성”은 “함왕성”으로 각각 발음이 와전되면서 중국에서 귀화한 당나라 장수인 함혁은 엉뚱하게도 함왕(사실은 임화자사인 “항양공”)이 되어 양근(항양) 함씨의 시조가 된 것이 아닌가 혼자 추측해 본다.
용문산 자연휴양림 입구의 산행 들머리에서 해발 543m의 두리봉을 거쳐서 해발 675m에 이르는 헬기장까지의 산길은 상당히 가파르면서 밟힌 흔적이 없는 낙엽이 도처에 수북히 쌓여 있는 데다가 산길조차 뚜렷하지 않은 구간이 더러 있을 정도로 등산객이 많이 다니지 않는 루트로 보였다. 등산로가 잘 정비된 백년 약수터 루트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은 것으로 느껴졌다.
오늘 등산은 출발지점으로 회귀하는 것이니만큼, 기왕이면 상행길과 하행길을 달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송대장의 의견에 반대할 수 있는 일행은 있을 수 없다. 어느 코스로 올라갈 것이냐를 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꼬우면 니가 산행대장 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잠자코 있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나머지 일행으로서는 대책도 없거니와 산행대장은 산행에 있어서 나머지 일행과 목표 및 이해관계를 완전히 같이하면서도 “우수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동기 산우회의 산행대장은 대학교 때 배운 이른바 “귀족적 엘리트주의”가 정의하는 등산 "엘리트"에 해당한다.
1시간 54분만에 헬기장에 도착하니 맞은 편에 거대한 삼각형의 암봉이 벽처럼 앞은 가로막듯이 솟은 채, 마치 “이제부터 등산을 시작하는 거다” 라고 말하는 듯하다. 멀리서 조망했을 때 보이는 삼각형의 매끈한 백운봉의 상부가 사실은 울퉁불퉁하고 험상굿은 암봉으로, 등산의 초보자들로 하여금 등산의 의지를 반쯤 꺾을 듯한 위압적인 모습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백운봉 등산의 어려움은 백년 약수터 루트를 택할 경우에는 새수골 계곡을 벗어나서부터 시작하고, 두리봉 루트를 택하더라도 헬기장을 지나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등산로는 가파른 구간과 평탄한 구간이 교대로 이어지는 형태여서 숨을 돌려가면서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경사각이 30도 이상인 오르막길만 이어지는 듯한 백운봉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평지성 길과 가파른 길을 같이 품으면서 이어진다. 인수봉 같은 직벽의 암봉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널리 인간의 뜻이 펼쳐지는 곳에는 인간이 다닐 수 있는 길이 나게 마련인데, 루신은 그것을 인간의 희망이라고 표현하였다.
백운봉 정상 아래의 막바지 가파른 길은 상당히 험하고 계단조차 3년 전에 비하면 낡아져 있었다, 다행히 정상의 데크는 깨끗하고 넓게 수리되어 있었다. 해발 940m의 백운봉 정상에서 남쪽을 보면 우리가 올라온 두리봉 능선길이 맨먼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고, 그 뒤에는 양평시가 펼쳐져 있다. 양평시 앞으로는 청회색의 남한강이 겨울 햇살 아래 부연 빛을 발하면서 남북으로 가로 놓여 있고 그 뒤에는 추읍산이 검푸르게 솟아있다. 동쪽으르는 용문면이 나지막한 능선들 아래 여러 계곡 사이의 평지에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다. 그 어딘가에 용문사가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다. 북쪽은 용문산 정상의 레이다 기지와 가섭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과 주변의 첩첩한 봉우리들이 거대한 산악을 이루고 있다.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중부내륙고속도로의 양평대교가 남한강 위로 세워져 있고 도심, 옥천 등의 마을이 남한강을 따라 멀리 시선 아래로 흐릿하게 보인다. 백운봉 정상은 송대장이 준비해 간 비닐돔을 펼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바람도 불지 않은 따듯한 기온이었다.
뒤늦게 정상에 도착한 서산장과 한 번 더 정상 기념촬영을 마치고 홀가분하고 경쾌한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가파른 계단과 바윗길을 더듬어 내려왔다. 주말을 맞아 백운봉 정상에서 아영하려는 젊은이들이 70리터 배낭을 짊어지고 올라오는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특히 동행자도 없이 혼자 올라오는 젊은 여성들을 보면서 용기와 체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헬기장과 새수골이 갈라지는 갈림길 삼거리에서 올라올 때와는 반대로 새수골 길을 택했다. 계곡은 길지만 핼기장길보다 덜 가파르다. 곳곳에 지난 11말의 폭설에 부러진 소나무가 보였다. 젖은 낙엽으로 덮인 바위길과 돌계단을 조심하면서 별다른 대화 없이 침묵 속에 하산하였다. 산행 중에 하산하는 시간은 혼자만의 상념으로 빠져들기에 가장 적절하다. 인생의 시간에서도 이와 유사한듯하다.
오전의 상행시와 마찬가지로 3명은 택시로, 나머지 5명은 양승찬 학형의 승용차를 이용하여 양평 시대로 들어 왔다. 새로 생긴 해장국 집에서 푸짐한 안주로 넉넉한 하산 회식을 즐겼다. 늘 그러하듯 오늘 하루 역시 힘들었지만 등산하기를 잘했다는 것은 일행 모두의 공통된 평가이다. 그러니까 다음 산행 약속을 또다시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되었다는 소식은 적어도 그 순간의 우리에게만은 TV 속에서나 벌어진 이야기일 따름이었다.
3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양승찬 학형이 저녁 식사대 전액을 아들 결혼시 축의에 대한 답례로 부담하는 미덕을 보여주었다. 백운봉아, 너는 참 훌륭한 산이구나!
-중회-